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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성경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본문

창세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스테레오 2018. 11. 26. 00:52

성경이 무오한 진리이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창세기 1장은 적잖이 골치거리이다. 이 문제는 적어도 수백년 전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고 주장하던 때 부터 제기된 문제이다. 

나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과정에 대한 서술이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에서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지구가 태양계의 행성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뜨고 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서 아무런 불편이 없다.

창세기 1장은 천체의 구조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때 교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천문학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그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오늘날 되풀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들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재단하려고 한다. 전자나 후자나 동일하게 범하는 오류는 성경을 과학적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고, 혹은 그러한 서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진리는 (굳이 구분하자면) 과학적이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다. 심지어 모세--나는 창세기의 저자를 모세라고 생각한다. 당시 유대 민족 중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지식인이 모세 외에 누가 있었는가?--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충분히 과학적으로 서술했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1장이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나는 당시 이집트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모세가 그러한 문헌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서술을 적절히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그 창조 설화는 당시의 상식이었을테고 말하자면 그것이 당시로서는 우주를 설명하는 가장 '과학'적, 혹은 '학술'적인 방식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당시 통용되는 우주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있다. 다시 말해 모세는 기존의 창조 설화의 재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인데, 새로운 것은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창조되었는가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

우선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순을 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태초에 창조하셨다 엘로힘께서 하늘들과 땅을' 이라는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 순서로 보면 하나님이 머나먼 곳에서 하늘들을 지나 다시 땅으로 내려오시는 심상을 가질 수 있다. 이어지는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표현에서 새가 날개짓을 하며 공중에 머무르는 의미인  rachaph 를 사용한 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신다'는 신약의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rachaph는 신 32:11에서 "독수리가 ...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에서 다시 사용된다.) 성경의 가장 첫 구절에서부터 '임마누엘'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경이로웠다.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bara'의 쓰임을 보면 1장 1절을 과잉해석 하고 있는 게 아님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 단어는 21절에서 "큰 바다 짐승" 등을 언급하며 두 번째로 사용된 다음, 본격적으로 27절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27절에서 창조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개역한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새번역)

개역 한글에는 창조하다가 두 번만 사용되었으나, 이 구절에서 bara'는 새번역에서와 같이 총 세 번 사용되었다. 나는 히브리어 문법이나 수사법을 몰라 이 삼중적 표현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에서 같은 단어를 세 번 반복했다는 것이 강조가 아닐 방법은 없다.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5장 1-2절에서 이 단어는 다시금 세 번 반복되며, 창세기에서 총 11회 사용된 bara' 중 7회가 사람을 창조했다는 데 할애되었다는 것 또한 천지 창조의 핵심이 사람의 창조에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감동이 있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천지 창조가 신 자신을 위한 창조이며, 인간은 그 신의 도구 혹은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로 이해하는 반면, 모세는 엘로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 오로지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창조된 세계가 그리고 그 중심의 인간을 보시며 좋았다, 혹은 즐거워 하셨다고(towb) 서술하고 있다.

창조의 순서나 그 세부 사항은 바로 이 창조의 목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6일 동안 진행되는 일은 혼돈과 공허의 땅으로부터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세상의 창조로 요약할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8)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표현은 원문의 "ṯōhū wāḇōhū"의 번역이다. 두 단어는 쌍으로 사용되어 공허하다, 비어있다, 또는 생산을 할 수 없는 무익한 상태(futile)를 일컬으며, 창조 이전의 세계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 의미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두 단어가 아주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28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시는 축복의 말씀 "생육하고 번성하라" 역시 ūrəḇū ūmil’ū 로 유사한 소리의 단어쌍으로 운(韻)이 맞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운어(韻語)를 사용함으로써 2절의 결핍이 28절에서 해결되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1장의 결론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31)

라고 되어 있다.  모세의 문체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심심할 만큼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러니 "심히"와 같은 강조의 말이 들어갈 경우 그가 "심히"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걸 지으신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신 이유는 단순히 조물주로서 자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데 있지 않다.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는 환경이 완전히 갖춰졌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시면서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자유는 2장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이라 느낌이 잘 오지 않지만 이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는 것을 보며 우리는 두려워 한다. 인간의 피조물이 인간을 배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두려움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것이다. 단지 먼 미래의 이야기라 안심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기계가 머지않아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율운전을 하는 자동차가 하루 빨리 시판될 것을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지게 될까봐 노심초사 한다. 10년 전에 나온 한 영화에서는 미 국방성을 통제하게 된 AI가 이 지구의 진정한 적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아무튼 피조물에게 자신을 배반할 수도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자유를 받은 인간은 정작 자신의 피조물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자신이 배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피조물 역시 반드시 배반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하나님은 과연 모르고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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