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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성경

좁은 문, 찾는 이, 기도 본문

마태복음

좁은 문, 찾는 이, 기도

스테레오 2018. 11. 19. 23:48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우리말 '찾다'는 좀 아리송한 말이다. 어떤 것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과 행위를 의미 할 수도, 그 결과 무언가를 발견한 상태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와 비교하자면, 전자는 seek, 또는 look for 에 해당하고, 후자는 discover 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 말에서 찾는다는 말은 찾아오다, 누군가를 방문하다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때 우리말 '찾다’는 영어 send for, call for 등에 해당하는 의미가 된다. 

그럼 위 본문에서 '찾는 이가 적다'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 문을 찾고 있는 사람, 아니면 탐색 끝에 찾게 된 사람 어느 쪽일까? 우리말 성경으로는 선뜻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보통은 전후 문맥을 통해 뜻을 알 수 있지만, 찾다는 앞서 7절에서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라고 번역 되어 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더 큰 혼선을 초래한다. 

헬라어 성경에는 '찾는 이' 부분에서 εὑρίσκω (heuriskó; 헤우리스코) 동사의 변화형 εὑρίσκοντες (헤우리스콘테스)가 사용되었다. 스트롱의 어휘 색인(Strong‘s Concordance)에 따르면, 헤우리스코는 무언가를 발견하다, 특히 수색/탐색 끝에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니 앞서 질문의 답은 일단 후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이 단어는 우리에게 꽤나 친숙하다.  아리키메데스가 목욕물이 넘치는 걸 보며 물체의 부피를 측정할 방법 을 찾아낸 순간 (옷도 입지 않고 거리로 나와) 외친 말 ’유레카’ 가 바로 이 헤우리스코의 완료형 εὕρηκα (헤우레카)였다. 

단어의 뜻을 확인했으니 그로부터 본문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 단어의 뜻을 숙고하지 않고 본문을 보면, 마치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사람들 앞에 제시되어 있고, 그 중 좁은 문보다 넓은 문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은 탐색의 결과로 소수의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지 찾기도 전에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복음이 하찮게 여겨지다 못해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다시 7절로 돌아가보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7: 7-8)


7절의 밑줄 친 부분을 우리 말로는 둘 다 ’찾다’ 라고 옮겨서 헛갈리지만 (이것이 우리 말의 묘미이기도 하다!), 원문 (ζητεῖτε; εὑρήσετε)이나 영어 번역(seek; find, NASB)은 전자가 탐색의 행위를, 후자가 그 결과로서의 발견을 의미 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참고로 6장부터 이어지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어서 덧붙인다. 주기도를 헬라어 대역 성경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말은 아주 공손한 말들(~받으시오며, 옵시며)로 되어 있는 것들이 다 '명령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이다. 물론 한국어로는 높임말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복신앙 혹은 이방인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 또한 분명하다. 이방인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신을 얼르고 달래며 거래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고자 서약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러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어쩌면 많은 돈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다만 그 돈을 어떻게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해 쓸 것인지 예산안을 함께 제출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가 정당한 간구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주실 것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이 예산안을 심사하시는 분은 결코 그럴싸한 미사여구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정욕을 위해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면 그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인간 부모도 자식이 뻔히 나쁜 짓을 하는 데 돈을 달라고 요청한다면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을 속여 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게 되었다면 기뻐할 일이 아니라 두려워 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그 뒤에 무서운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연일 최저임금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저임금이 올라 나라가 망하게 될 거라고 말하고 글쓰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최저임금보다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받으며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우선 살펴볼 일이다. 더불어 나의 마음 한켠에 하나님을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악덕업주 이미지로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헬라어 성경 참조: https://biblehub.com/interlinear/matthew/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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